통속적인 상황을 다루는 신선한 방법 (좋아서 하는 밴드 - 0.4)
0.4
- 안복진 작사/작곡
좋아서 하는 밴드 1집 <우리가 계절이라면>
맞은편 문에 서있는 낯익은 그가 날 보며 웃네
이제는 뚜렷치 않은 노선표만큼 아른하네
늘상 너에겐 여름이 남들보다도 이르게 오지
눈을 비벼 다시 봐도 저 사람은 너일 것 같아
발을 내민다 널 향해 걸어간다
멀어보이던 너의 얼굴이 점점 또렷해진다
너 같은 얼굴 아니 내가 아는 너는 아냐
착각이란 걸 안 순간 늦어버렸네
내 눈은 0.4구나 내 맘은 0.4구나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는 넌 날 자꾸 괴롭혀
온 세상이 뿌옇게 보여 내 눈은
널 바래다주던 동네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어
목 끝까지 네 이름을 외치려다 입을 다물었어
늘상 너에겐 겨울이 남들보다도 이르게 오지
눈을 비벼 다시 봐도 저 사람은 너일 것 같아
어쩜 널 닮은 사람 참 이렇게도 많은 건지
내가 걷는 거리엔 어디든지 나타나
사실 널 본 다 해도 우린 달라질 게 없는 걸
시간이 갈수록 흐릿해져 가는 너
통속적인 상황을 다루는 신선한 방법
(좋아서하는 밴드-0.4)
'한 번 쯤 우연히 만날 것도 같은데, 닮은 사람 하나 보지 못했어.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일까. 저 골목을 돌면 만나지려나.'
벌써 20년이 넘은 가요, <너를 향한 마음>에서 이승환은 헤어진 연인과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노래했다. 너무나 보고 싶지만, 닮은 사람조차 마주치기 힘든 현실과 달리 영화를 비롯한 영상매체에서 우연한 만남은 흔하게 쓰이는 스토리 전개 방법이다. 우연이 밥먹듯이 일어나는 가상 속의 간접경험 때문인지, 헤어진 그 사람과는 언젠가 한 번쯤 그렇게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여기 좋아서 하는 밴드 1집의 수록곡 '0.4'도 헤어진 연인과의 만남이라는 통속적인 소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실에 발을 디딘 가사를 통해 색다른 신선함을 보여준다.
조금은 한적한 오후의 지하철. 노선표를 확인하려 눈을 든 순간, 이제는 헤어진 옛 연인과 눈이 마주친 상황. 갑작스럽게 쿵쾅대는 심장소리 같은 퍼커션과 함께 노래는 시작된다. 계절보다 이른 여름옷을 입은 모습에 그일 것이라고 확신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가가지만, 다행히 또는 불행히도 그를 닮은 다른 사람이었다. 결국 안경을 쓰지 않은 나의 시력을 탓하고,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탓하게 된다. 이 곡의 이상한 제목 0.4가 도대체 뭘까 궁금해 하던 사람은, 내 눈의 시력이 0.4라는 후렴구에서 묘한 신선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2절은 남자의 시선으로 바뀐다. 헤어진 여자를 바래다주던 길에서 그녀와 비슷한 뒷모습을 본 남자는 그녀를 부르고 싶지만, 오히려 그녀보다 소심하다. 이름을 부르지도, 앞으로 달려가서 그녀를 확인하지도 못하고 다만 그녀일 것만 같은 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상상은 좀 더 멀리 나아가서, 적극적인 그녀와 소극적인 그 남자의 연애가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지 짐작해보게 된다.
많은 연애가 그렇듯이, 연애가 끝나면 끝난 채로 두어야 한다. 우연히 만난 그녀 또는 그를 불러세운다 한들 두 사람의 관계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진 그 사람을 다시 보고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시간만이 이 마음을 흐릿하게 해줄 뿐.
좋아서 하는 밴드는 '유통기한'이라는 곡에서 이미 실연의 상처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준 바 있다. 우유곽 위에 찍혀있는 유통기한을 우연히 보고는 옛 연인과의 기념일과 특정한 숫자가 연상되어 아픔을 느끼게 된다는 얘기를 조준호의 애절한 보컬로 노래하였다. 유통기한과 0.4라니. 그동안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랑의 노랫말을 쓰는 이들에게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찾을 수 있는 영상은 이것 뿐인 듯한데 이 라이브보다는 앨범버전이 더 좋은 듯